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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 그룹 창업자 허만정, 독립운동, GS그룹 LG그룹 분리

by ahnsmile2024 2025. 2. 9.

독립운동을 지지해 온 집안 GS. 창업주 허만정 선생의 끝없는 독립운동 이야기, 그리고 GS의허 씨 가문과 LG의구 씨 가문의 그룹 경영 및 분리 과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GS 로고
GS

 

GS의 창업주 허만정 선생의 독립운동

2004년 GS가 LG에서 분리되면서 GS는 허만정 선생을 창립자로 추대했습니다. 허만정은 1897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대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허만정의 아버지 허준은 관직을 수행하다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재산을 후손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재산을 학교에 기부했습니다. 이렇게 강직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허만정은 17세 때 이미 독립운동 단체 백산상회에 주주로 가입해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겉으로는 곡물과 해산물을 판매하던 상점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과 네트워크 관리를 하는 위장 회사였습니다. 독립군의 은행이라고 불릴만큼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1919년 조선 국권 회복단 운동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회사 간부들은 투옥과 고문을 당했고 결국 1928년 해체되었습니다. 백산상회는 경제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허만정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3.1 독립운동을 목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 재능 있는 인재를 길러야만 일본 점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에 오자마자 아버지의 도움으로 진주에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25년 논 93,000평, 밭 35,000평, 현금 7만원을 들여 일신여자일반학교가 개교했으며, 지금도 진주여고로 남아있습니다. 1920년대에는 주일상회, 협성상회, 경상남도 십상은행 등 다양한 기업의 발기인으로 투자하고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민족 자본을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기업에 투자했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남해 사당인 충렬사가 낡아 무너지기 시작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눈치를 보기 꺼려했지만 허만정은 당당하게 공사비를 기부하며 일제 감시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23년에는 백정의 지위를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인 진주형평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지주의 아들이 백정들의 자유를 위한 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신문사 중앙일보를 설립하고 부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이 신문은 일본에 저항하는 기사를 계속 발행했고, 조선총독부로부터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GS 허 가문과 LG 구씨 가문의 만남

해방 이후에도 허만정은 사업에 계속 투자했습니다. 셋째는 아들 허준구의 손을 잡고 부산에 있는 사돈의 집으로 갔고, 그는 바로 LG의 전신 구인회의 창업자였습니다. 원래 구 씨와 허 씨는 모두 진주에서 유명한 가문이었습니다. 구인회 창업자가 허을수 여사와 결혼했을 때 허 씨 가문의 일원이었던 허만정은 투자하고 싶다며 구인회 창업자를 찾아갔습니다. 이때부터 구 씨와 허 씨는 모든 사업에서 65대 35의 점유율을 유지하게 됩니다. 허만정은 아들에게 '구 씨가 경영을 맡을 테니 도와주는 일에 충실해 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이렇게 해서 대외적으로 경영하는 구씨 가문과 주로 재정과 안전 관리를 담당하는 허 씨 가문이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허준구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부산으로 갔을 때 구인회의 무역 사업은 매우 작았습니다. 일본에서 숯과 농기구를 수입해 판매했지만 사업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허준구가 입사한 후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고, 당시 출시된 '동동구리무 럭키크림'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럭키케미칼을 설립하고 직접 플라스틱 용기를 생산해 화장품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허준구는 일본에서 유학한 엘리트 학생이었지만 공장을 돌아다니며 밤새 포장 작업을 했습니다. 럭키 치약을 개발할 당시 부산 국제시장을 돌아다니며 리어카를 끌며 직접 영업을 담당했습니다. 계산이 빠른 그는 회계도 담당했고, 한때 럭키그룹 기획조정실 기획조정실장으로 2인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묵묵히 구 씨 일가를 지원했습니다. 허준구는 은둔의 경영자였습니다. LG그룹의 발전에 50년 이상 기여해 온 허준구 회장은 1995년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고 럭키화학이 사명을 LG로 변경하면서 후배들을 위해 경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마케팅 천재 허신구

럭키화학이 성장하면서 다른 허 씨 일가도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LG의 혁신에 크게 기여한 허만정 회장의 넷째 아들 허신구는 원래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의 해운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이때 구인회 회장이 부산에서 서울로 사업장을 옮기면서 허신구 씨에게 전화를 걸어 럭키화학에 입사했습니다. 입사 후 두 가지 제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첫 번째는 국내 최초의 합성 세제인 하이타이입니다. 그 전에는 한국에서 세탁용 비누만 사용했습니다. 하이타이가 처음 출시된 직후 세탁기가 보급되었고, 하이타이는 곧 세탁 세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플라스틱 창문 하이샷시를 개발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주로 나무로 창틀을 만들었지만 나무는 강도가 약했고, 강철은 녹슬었으며, 알루미늄은 단열에 약했습니다.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 플라스틱 창틀 하이샤시를 출시해 대한민국의 창틀을 모두 바꿨습니다. 허신구는 마케팅의 천재로 유명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허신구가 럭키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금성사의 사장으로 있을때 석유 파동으로 인해 경기 침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허신구는 아이디어를 내어 가전제품이 필요한 예비 부부를 위한 특별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바로 금성 허니문 세일이었는데, 예비 부부들이 제품을 구매하고 할부로 결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용카드 할부가 있지만 당시에는 할부가 없었습니다. 이 이벤트는 가전제품을 한꺼번에 구매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당시 가전업계 최초의 홍보 캠페인이기도 했습니다. 마케팅과 신제품 개발의 천재로 불렸던 허신구는 1970년 금성전선 사장, 1971년 럭키화학 사장을 역임하며 LG의 핵심 계열사를 이끌었습니다.

 

LG그룹과 GS그룹의 분리

이처럼 허 씨와 구 씨 일가는 50여 년 동안 나란히 회사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다 계열사 수가 너무 많아지고 복잡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분리 독립을 결정했는데, 놀라운 점은 두 가문의 분리가 갈등 없이 평화로웠다는 점입니다. 특히 허 씨 일가의 LG전선 포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LG전선은 송배선용 케이블을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허준구와 허신구, 허창수까지 3대가 나란히 사장과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대기업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에 모두가 의아해했습니다. 허 씨 일가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허신구는 LG전선을 양보하고 정유, 건설 및 유통 사업부를 유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두 그룹은 서로 양보함으로써 원만하게 분리되었고, LG와 GS는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GS로 독립한 이후 3개사업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편의점을 포함한 GS리테일의 매출은 약 15%, GS칼텍스와 GS에너지의 정유 사업부는 50%, 자이아파트로 알려진 GS건설은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유 외 대부분의 GS 사업은 국내 경제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사업 탐색과 투자, 많은 기업을 인수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만큼 이들을 기리는 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5명의 독립운동가가 손글씨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습니다. 또한 8.15 기부 마라톤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으며, 행사의 수익금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생활환경 개선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GS 25도 꾸준히 독립운동가를 홍보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창업자 허만정의 정신을 계승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GS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