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선행을 통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기업 오뚜기. 창업자 함태호 회장이 국내에 처음 소개한 카레, 케첩, 마요네즈, 레토르트 식품, 라면 시장, 사회공헌 활동 등을 소개합니다.
오뚜기의 창업자 함태호 회장
오뚜기의 창업자 함태호는 193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함형준은 한국전쟁 전에 월남해 부산에서 건어물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이 잘 되자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불러들였습니다. 소년 시절 함태호는 부유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피난 대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가족 모두 위험한 결정에 반대했지만 그는 육군 일반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전선에 배치되어 전투를 이끌었고, 제대 후 홍익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조흥화학이라는 회사를 공동 창업해 운영했습니다. 함태호는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해 10년간 일하면서 자신의 사업을 꿈꾸었습니다. 이때 삼양과 농심이 한국에서 라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라면 외에 다른 음식을 찾던 그는 한국에 카레를 도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카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소개되었지만 부자들만 접할 수 있었고, 모두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이었습니다. 함태호는 카레를 우리 입맛에 맞게 개량해 쌀과 국을 찾는 한국인들이 국으로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냉장고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레를 분말 형태로 만들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했고, 40세에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풍림상사라는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오뚜기 카레 광고 효과
1969년 첫 선을 보인 오뚜기 카레는 당시 평균 가구 수가 5가구였기 때문에 5인분 용량으로 출시했습니다. 또한 가족 단위 소비자들을 위해 5월 5일 어린이날에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회사명인 풍림산업과 제품명인 오뚜기 카레 모두 인지도가 낮고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함태호 창업주와 영업사원들이 버스를 타고 곳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보통 제조업체는 중간 도매업체에 제품을 공급하고 도매업체는 전국 매장에 판매하지만, 풍림상사는 영업사원이 직접 매장을 방문해 제품을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국내 최초로 루트 세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루트 세일은 마트를 방문해 직접 주인에게 인사하고 제품을 진열해주고 매장을 도와주며 제품을 홍보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배고플 시간에 맞춰서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다가 집에 돌아와 '일요일은 오뚜기 카레'를 외치는 TV 광고를 시작했고, 광고 효과로 인해 1년 만에 사명이 오뚜기로 변경되었습니다.
국내 최초 레토르트 제품 출시
함태호 회장은 부자들만 수입해 먹던 토마토 케첩과 마요네즈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한국산 토마토 케첩이 있었는데, 토마토 함량이 0%였고, 밀가루 페이스트에 식초와 간장으로 맛을 낸 데다 붉은 색소를 사용한 불량식품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외국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제대로 된 케첩과 마요네즈를 도입하기 위한 설비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인즈 케첩과 베스트푸드의 마요네즈가 국내에 수입되고 있었지만 오뚜기가 압도적인 차이로 국내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카레에서도 혁신이 일어납니다. 국내 최초의 레토르트 제품인 오뚜기의 3분 요리 시리즈를 출시했습니다. 레토르트 제품은 완전히 조리된 음식을 특수 포장에 넣어 살균하는 제품입니다. 살균력이 뛰어나 방부제를 첨가할 필요가 없고 가열 후 바로 먹을 수 있어 맛과 영양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국내 최초로 레토르트 제품을 선보인 오뚜기는 3분 카레를 시작으로 짜장, 미트볼, 제육덮밥, 낚지덮밥 등을 출시하는 등 국내 레토르트 시장 점유율이 70%를 넘었습니다.
라면시장 2위 - K라면 열풍
카레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즉석식품은 라면의 필수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함태호는 라면을 만드는 청보식품을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라면 시장에는 농심, 삼양식품, 팔도, 빙그레 등의 기업들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뚜기는 새로운 라면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맛을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제품이 진라면, 스낵라면, 열라면, 참깨라면 등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라면 산업에서 오랫동안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2012년부터 반격이 일어났습니다. 진라면, 스낵라면 등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고 참깨라면, 열라면 등도 주목받았습니다. 그 결과 오뚜기는 라면 업계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뚜기의 라면 사업 진출은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꼽힙니다. 카레와 케첩 시장은 크게 성장하지 못했지만 라면 시장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4천억 원 규모였던 라면 시장은 이제 2조 원을 넘어섰고, 해외에서는 K라면 열풍이 불면서 오뚜기의 수출 비중이 전체의 70%를 차지했습니다.
함태호 회장의 사회공헌
함태호 회장의 이야기가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6년 노환으로 별세한 그의 장례식에 이례적으로 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찾아오면서부터입니다. 함태호 회장은 1992년부터 한국심장재단을 통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5,000여 명의 수술비를 지원했고, 1996년부터는 1,000여 명의 학생들에게 65억 원 이상의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그 결과 함 회장의 장례식에는 잘 자란 학생들이 찾아와 그의 선행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그의 선행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함태호 회장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에 알리지 말라"는 특유의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함태호 회장은 생전 조용한 윤리경영을 강조하며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지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해왔습니다. 함태호 회장은 어린이 환자와 장학금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오뚜기는 2012년부터 장애인이 직원으로 근무하는 밀알복지재단 굿윌스토어에 선물세트 조립과 가공을 맡겼습니다. 2015년 함태호 회장은 자신의 개인 주식 3만 주와 당시 가치로 315억 원 이상을 밀알복지재단에 기부했습니다. 또한 매년 두 차례 오뚜기 학술상을 만들어 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한 학자들에게 수여하는 등 다양한 후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많은 음식을 들고 와 현금과 현물 지원을 약속하며 "계약을 절대 알리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후 장미란은 함태호 회장이 키가 큰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함태호 회장은 사람을 비정규직으로 쓰지 말라는 철학을 남겼을 정도로 마트 시식 코너에서 정규직 직원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갓뚜기라는 별명이 붙기 전인 2014년에는 라면 시장에서 19%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2018년에는 28%까지 치솟았습니다. 좋은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실제 기업 수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식품 산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바른 경영을 한다면 소비자로서 끝까지 오뚜기를 응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