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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슨모빌, 석유왕 록펠러 독점, 오일붐, 오일쇼크

by ahnsmile2024 2025. 4. 18.

팬데믹 당시 유난히 주가가 많이 빠진 회사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정유회사 엑슨모빌입니다. 세계적인 ESG 열풍을 타고 친환경 에너지가 주목을 받았고, 화석연료를 개발하는 정유회사들은 질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작년 초 친환경 에너지의 상징인 테슬라는 41%나 하락했고 엑스모빌은 21% 올라 일시적으로 엑슨모빌이 테슬라의 시총을 추월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경제활동이 정상화되면서 에너지 수요는 급증했습니다. 또 에너지 공급 불안정성이 더해져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적인 이상 기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재 친환경 에너지 이야기는 쏙 들어갔습니다. 주가상승 덕분에 M7에 엑슨모빌을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미국의 석유 역사 그 자체인 엑스모빌의 창업자 록펠러의 석유 독점과, 오일붐과 오일쇼크 등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엑슨모빌
엑슨모빌

 

석유왕 록펠러의 독점

석유왕이자 역대 최고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는 1837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의 경제 교육을 투철하게 시킵니다. 파리를 잡으면 3센트, 쥐를 잡으면 5센트의 용돈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돈을 빌려주면 자식에게도 이자를 받고, 커서는 집세도 받았습니다. 아빠가 아래서 받아줄 테니 나무에서 떨어져 보라고 한 뒤 받아주지 않고는 '아무도 믿지 마라. 아빠인 나조차도'라는 말을 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이렇게 혹독한 경제 교육을 받고 자란 록펠러는 남달랐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업할 수 있는 가장 큰 회사를 찾아가 경리 업무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다 당시 출현한 바위 기름, 석유를 눈여겨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램프를 켜기 위해 비싼 고래기름을 사용했습니다. 1859년 펜실베이니아의 타이터스빌의 지하 23m에서 처음 발견된 석유는 굉장히 저렴하게 램프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인들은 밤에도 먹고 마시고 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록펠러가 1882년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석유회사 세웁니다. 록펠러는 빚을 갚을 만큼 현금이 회수되어도 그냥 이자를 내면서 계속 재투자를 했을 만큼 야수의 심장이었습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에서 경쟁자를 제거했습니다. 때로는 협박하거나 달래고, 압박해서 회사를 팔거나 폐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가격을 엄청나게 낮춰서 소규모 경쟁자들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바로 가격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명목뿐인 껍데기 회사를 통해 경쟁사의 지분을 확보하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스탠더드 오일은 1879년 미국 정유 시설의 90%를 장악하게 됩니다. 전형적인 독점 자본가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도 독점 금지에 관한 법률이 엄격해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때는 그런 법이 없었고, 반독점법이 바로 스탠더드 오일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록펠러의 기부 선행

1902년 '맥클루어 매거진'의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스탠다드 오일의 기만적인 사업관행과, 경쟁을 방해하는 합의, 의회를 상대로 한 로비까지 시리즈로 폭로를 합니다. 사실, 아이다의 아버지는 스탠더드 오일 때문에 망했던 사업자였습니다. 자업자득의 결과였습니다. 마침 그 전해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반독점 공약으로 대통령의 당선이 됐던 상황이었습니다. 스탠더드 오일은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소송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을 34개로 분리하라고 판결합니다. 하지만 이때 이미 미국 전체 석유의 4분의 1을 생산하고 있던 스탠더드 오일은 쪼개도 규고가 컸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던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은 '엑슨'이 되었고, 뉴욕의 스탠더드 오일은 '모빌', 스탠더드 오일 캘리포니아는 '셰브론', 콘티넨털 오일은 '코노코'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석유산업을 주름잡고 있는 기업들입니다. 이를 포함해 34개로 쪼개진 회사는 합종연횡을 하며 미국의 석유 산업을 쭉 이끌어 왔습니다. 그럼 록펠러는 기업 분할로 재산을 잃었을까요? 이 34개 회사 지분을 고루 챙기며 더 큰 부자가 됩니다. 록펠러는 못된 짓을 참 많이도 했지만 오늘날 자기 계발서에서 긍정의 아이콘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실 록펠러는 그동안 만성소화불량과 우울증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렇게 경쟁자를 제거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다 55세가 되던 해, '알로페시아'라는 암에 걸려 1년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어머니가 남은 시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권유했고 기부를 시작합니다. 록펠러는 이미 미국 최고의 부자였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했는데도 돈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록펠러는 나누는 삶에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뜻밖에 록펠러는 97세까지 장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록펠러 재단을 설립해서 가문 대대로 기부를 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일붐

한편, 1900년대 초가 되자 석유는 다양한 분야의 에너지원이 됩니다. 증기선, 기차, 자동차까지 다양한 곳에 쓰였습니다. 1908년 헨리포드가 모델 T를 출시하고 이후 10년간 자동차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오일 붐으로 이어졌고,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엑슨은 중요한 위치로 떠오릅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군함의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되었습니다. 석유의 중요성은 더 부각되기 시작했고, 독일은 대서양을 건너오는 미국의 유조선을 공격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관건은 석유였습니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한 것도 동인도제도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쟁 중 미국의 석유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고, 석유는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미 엑슨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유전을 발굴하기 시작합니다. 1927년 이라크에 첫 구멍을 뚫었는데, 원유가 5m 높이로 솟구쳤고, 이를 막는 데만 8일이 걸렸습니다. 그러자 엑슨은 석유 회사들과 손잡고 튀르키예, 시리아, 이라크,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오만의 여러 지역을 망라하는 개발에 들어갑니다. 바로 1928년 이뤄진 레드라인 계약입니다. 이로써 엑스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다시 그렸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이 지역 국가들은 석유로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고통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승전 이후 20년간 미국 경제는 유례없는 속도로 성장했고 석유 수요는 더 커졌습니다. 이 시기에 엑슨은 인재를 흡수 양성하며 최고의 R&D 시스템을 구축했고, 전 세계 100개 이상의 지사를 가진 다국적 회사가 되었습니다.

 

오일쇼크

한편, 엑슨의 입지가 더 강해지는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1970년대 오일 쇼크입니다.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이 6일 전쟁으로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할 것과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중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석유생산량을 감축하고, 이스라엘의 최우방국인 미국에 석유수출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몇 달간 석유 가격은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4배 상승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TV에 나와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에너지 공급난'이라며, 실내온도를 낮추고, 카풀을 이용하고, 시속 80km 이하로 주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시민들은 오히려 주유소를 찾아 긴 줄을 서고 연료를 꽉꽉 채웠습니다. 그러자 이미 국제적으로 석유사업을 망라하고 있던 엑슨이 나섭니다. 엑슨은 중동국가의 석유는 유럽과 일본으로 보냈고, 금수조치가 없는 이란,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의 석유를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국제적으로 복잡한 조율을 한 것입니다. 금수 기간 동안 미국으로 수송된 원유량은 17% 감소했지만, 유럽은 18.6%, 일본도 16%로 전 세계가 비슷하게 감소합니다. 엑슨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공급량이 29% 감소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유럽과 일본 등 다른 나라들은 엑슨에 불만을 터뜨렸지만 전 세계가 석유 회사의 권력을 체감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이때 엑슨은 중동에만 의존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다른 지역에서 원유를 발굴하기 시작합니다. 알래스카, 호주, 말레이시아, 북해 등에서 유전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 석유 공급량은 늘어났습니다. 현재 엑슨의 매출액은 웬만한 중소국가의 국민 총생산을 능가합니다. 수십억 배럴의 석유를 비축해 놓았으며, 수백 개의 지사가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게다가 엑슨은 1999년 모빌을 다시 합병하는 데 성공합니다.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 엑슨모빌이 탄생한 것입니다.

 

에너지 수요 vs 친환경 에너지

엑슨모빌이 다시 합병을 한 루 25년이 흘렀습니다. 엑슨모빌의 매출은 점점 커져갔지만 석유회사는 탐욕과 부패 환경 파괴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1989년 알래스카에서 발생한 유조선 엑슨발데즈의 원유 유출 사고로 알래스카 생태계가 크게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도 또 여러 차례 원유 유출 사고가 있었으나 회사는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또 엑슨모빌은 2000년부터 화석연료와 지구 온난화에 대해 신뢰할 수 없고 과학적 결론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하며 학계에 오랜 로비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2023년 하버드대학 연구진은 엑슨모빌은 1970년대부터 이미 기후 변화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내부 문건을 발견했습니다. 엑슨모빌은 1977년부터 2003년까지 자체 개발한 기후 모델을 통해 지구 기온이 10년마다 0.2도씩 오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기후변화 위험을 알고도 은폐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한편, 팬데믹 때 시작된 ESG와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엑스모빌에도 변화를 촉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2020년 8월, 엑스모빌은 1928년 이후 처음으로 다우존스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자 주주들은 엑슨모빌의 기후변화 대응과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을 요구했고, 이는 2021년 주주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활동가 투자자들이 엑슨모빌 이사회에 새로운 이사를 선임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라는 강한 압박을 시작했습니다. 록펠러 가문도 같은 성명을 냈습니다. 그래서 엑슨모빌은 친환경 에너지 기술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CF인더스트리와 연간 50만 톤씩 탄소를 포집하는 계약을 맺었고, 미역 등의 해조류를 활용한 바이오 연료 개발에도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여전히 화석연료의 생산과 정제로 움직이는 정유회사에게는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당장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를 보면서 정유 회사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화석 에너지에 너무나도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석유의 역사와 함께한 엑슨모빌의 160년이라는 역사를 보면서 인류가 이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급격한 변화를 겪었는지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