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MLB 월드투어로 한국에 온 LA 다저스 감독에게 야구선수 류현진이 성심빵을 선물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PPL도 아니었지만 성심당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지난해에는 소셜 미디어에서 성심당이 허위 광고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성심당에서 판매하는 딸기 시루 케이크는 2.3kg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무게를 측정하면 2.3kg이 넘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한 소비자가 성심당이 과소광고를 하고 있다며 소셜 미디어에 소문을 올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런 허위 광고는 환영한다며 성심당의 빵을 사기위해 전국에서 달려갔습니다. 노잼 도시 대전을 초특급 꿀잼 도시로 만든 빵집이 바로 성심당입니다. 성심당의 창업과 대전의 명물 튀김 소보루의 탄생 과정, 기업의 선행 등을 소개합니다.
성심당의 창업
함경남도 함흥의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던 임길순은 1950년 한국전쟁 중 흥남부두 철수작전의 마지막 배에 겨우 탑승하여 경남 진해에 정착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냉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6년이 되던 해 경부선 철도가 개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길순은 고향과 가까우면서도 대도시인 서울에 자리 잡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5시간을 달리던 기차 갑자기 고장으로 대전에서 멈췄습니다. 당시 기차가 막 개통한데가 시설도 열악해서 한번 멈추면 언제 다시 떠날지 기약이 없었습니다. 어쩔수없이 길순 가족은 대전에 내렸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길순은 역에서 가까운 성당에 찾아갔습니다. 길순의 사연을 들은 신부님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밀가루 2포대를 건네줍니다. 길순은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천막에 나무 간판도 내겁니다. 이때 간판에 쓰인 빵집 이름이 바로 예수의 마음을 뜻하는 성심당이었습니다. 임길순이 성심당이란 이름을 붙인 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길순은 하루에 찐빵 300개를 만들고 100개는 남겨서 역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마침 이때는 정부가 혼분식 장려 정책을 펼 때였습니다. 쌀이 부족하니까 정부가 밀가루 소비를 적극 장려했고 미국의 밀가루 무상 원조도 많이 들어왔을 때입니다. 그 결과 성심당 빵집은 점차 자리를 잡았고, 2년 만에 작은 가게에 월세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전의 명물 튀김소보로
성심당에는 치명적인 약점은 창업주 임길순이 빵을 못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장장과 제빵사를 고용해 빵집을 운영을 했습니다. 그러다 제빵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잠적합니다. 주인에게 빵기술이 없는 걸 아는 제빵사들이 툭하면 가불을 하고 근무시간에 술을 마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닐 수 없었던 임길순은 어느 날 "더 이상 가불은 없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날 밤 공장장은 제빵사 4명을 데리고 성심당을 떠납니다. 성심당은 하룻밤 사이에 제빵사가 없는 빵집으로 전락했습니다. 대학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하고, 가업을 이어 갈 생각이 없었던 장남 임영진은 이 사건을 지켜보며 제빵 기술을 습득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깨 너머로 빵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20대 초반의 영진은 제빵 기술을 연구했습니다. 얼마 뒤 새 공장장 오용식이 들어옵니다. 공장장 오용식은 아이디어가 많고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어했고, 영진과 잘 맞았습니다. 매일 새로운 재료와 레시피를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1980년 튀김소보로를 선보였습니다. 단팥빵의 달콤함과 소보로의 고소한 맛, 도넛의 바삭함이 빵 하나에 담겼습니다. 소보로를 실수로 튀김기에 빠뜨려서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이 아이디어를 낸 후 여러 번 실험을 반복하며 제품을 개발한 것입니다. 또한 영진은 튀김소보로를 만드는 과정을 손님이 볼 수 있도록 생산라인을 설치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빵 공장은 어둡고 칙칙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불량식품 만들어졌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영진은 눈앞에서 빵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기름 끓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골목으로 퍼졌고, 빵집을 찾은 고객들은 소보로 빵 튀기는 모습을 신기한듯 지켜봤습니다. 이처럼 튀김소보로는 시각, 청각, 후각을 즐길 수 있는 메뉴였습니다. 그 결과 골목마다 긴 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영진은 은행 창구에서 봤던 번호표를 도입했고, 구매 수량도 3개로 제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튀김소보로는 성심당과 대전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성심당의 위기 극복
튀김소보로를 만든 임영진은 28세의 나이에 정식으로 성심당 경영을 맡게 됩니다. 1982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혼여행으로 일본에 건나가 궁금했던 일본 빵 시장을 보았습니다. 미대를 졸업한 그의 아내는 일본의 빵집 인테리어를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성심당의 조명을 모두 바꿨습니다. 백열등 대신 할로겐 조명을 사용해 빵이 마치 미술관 작품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1980년대 황금기를 보내면서 성심당은 지역 명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성심당에도 닥쳤습니다. 성심당이 있던 원도심의 핵심 관공서가 다른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원도심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빵집의 트렌드도 바뀌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소보로, 단팥빵 같은 일본식 빵들이 유행했지만 1990년대부터는 바게트, 크루아상, 치아바타 같은 정통 유럽식 빵이 등장했습니다. 유럽식 빵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튀김소보로 같은 빵은 기름에 튀긴 불량식품이라는 이미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이 등장하면서 동네 빵집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형의 성심당 운영을 돕던 동생이 독립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는 성심당 이름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게 1996년 두 개의 성심당이 탄생했습니다. 형은 성심당 본점만 운영했지만, 동생은 법인을 열고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로 확장해 가맹점을 24개까지 늘렸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크게 확장하다 보니 일관된 품질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상황을 몰랐던 고객들은 영진이 운영하는 성심당 본점에 찾아와서 성심당 맛이 달라졌다고 불평했습니다. 1996년 시작된 동생의 성심당 프랜차이즈 사업은 외환위기를 겪고 계속 쇠퇴한 결과 2003년 파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형의 성심당도 부채를 떠안고 인지도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2005년 밤사이 일어난 화재로 3층 공장이 전소되어 빵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너무 암담했던 영진 부부는 빵 사업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빵집에 갔을때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심당 직원들이 잿더미 속에서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청소와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감동한 영진 부부는 중고 기계를 구해 매장 한쪽에 임시로 공간을 마련해 빵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직원들이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화재 6일 만에 가게를 다시 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문을 열자 대전 시민들이 밀려 들어와 따뜻하게 손을 잡고 위로를 해 주며 빵을 사갔습니다.
성심당의 선행
성심당은 창업주 임길순부터 직원들을 매우 아꼈습니다. 어린 제빵사들 중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직원들을 학비를 대주면서 야간학교에 다니게 했습니다. 또 대전역에 첫 문을 연 이래 매일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남은 빵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는 빵의 양이 매달 3천만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임영진도 부모님의 뜻대로 돈을 벌기 위해 좋은 일을 한 게 아니라 나눔을 위해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이 마음을 지역 직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알았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성심당이 교황의 빵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성심당에는 큰 영광이었습니다. 교황은 식사 때마다 나온 모든 빵과 디저트를 맛있게 드셨습니다. 또 바티칸 직원들을 위한 초콜릿을 주문하고 초콜릿 값도 지불하셨습니다. 성심당은 교황이 먹은 빵이라고 소문이 나며 전국에서 빵을 사러 왔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연이어 좋은 일이 일어나는데 감사한 마음을 가진 임영진 부부는 더 좋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매년 회사의 영업이익의 15%를 직원들을 위한 인센티브로 나누고, 빵은 물론 직원들의 외국어 교육까지 자기 계발비를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빵을 기부하는 것 외에도 영업이익의 상당 부분을 기부했습니다. 성심당은 팝업스토어 외에는 다른 지역에 진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받은 사랑을 대전에서 보답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현재 대전에서 10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성심당은 4,000개의 직영점과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는 파리바게트보다 높은 영업 이익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창업 70주년을 맞이한 성심당이 100년이 넘게 지역사회의 따뜻한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