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두산은 조흥은행과 최장수 기업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으며, 이는 기네스북에서도 조사된 바 있습니다. 1896년 종로에서 처음 시작된 두산은 이후 128년 동안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성장하며 다양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두산의 시작, 사업 다각화, 야구단 창단 등 두산의 오랜 역사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박승직 상점의 화장품 사업
두산그룹은 박승직 상점에서 시작됩니다. 경기도 광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박승직. 농사에 회의감을 느낀 박승직은 장사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18세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아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갑오개혁 이후 모아둔 돈으로 종로4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포목상을 열었습니다. 바로 박승직 상점이었습니다. 박승직은 육의전 가게에서만 취급하던 원단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대문 지역 상인들을 모아 광장시장을 만들었고, 일본에서 면직물을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박승직의 아내는 전통 화장분을 보고 상품화해서 박가분을 만들었는데, 이는 기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처음에는 포목점 단골 고객에게 공짜선물로 나눠줬지만 곧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박승직은 박가분을 상표로 등록하고 30명 이상의 여직원을 고용해 대량 생산에 나섰습니다. 하루 판매량은 1만 갑을 넘었습니다. 전통 화장품은 쌀, 보리, 조개가루로 만들지만 바르면 피부에 잘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박가분에느 납가루를 섞어서 피부에 잘 달라붙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품이 납 중독을 일으켜 피부 괴사, 광기 등 부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과 영국에서도 발견된 문제였으며, 박승직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화장품 사업을 접었습니다. 하지만 박승직 상점은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70대였습니다.
사업의 다각화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은 조선은행에서 근무했지만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사업에 참여해 두산의 초대 회장이 됩니다. 박두병은 출근 도장 찍기, 상여금 지급, 여직원 채용 등 신경영 방식을 도입해 매장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또한 사내 야구부를 구성해 동대문 상인들과 친선 경기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으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사업을 그만뒀습니다. 이후 박두병은 쇼와 기린 맥주에 입사해 총괄 매니저로 일했습니다. 1948년 동양맥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오비맥주가 탄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씨는 자신의 사업을 계속 꿈꿨고, 1946년에는 아버지가 만든 박승직 상점을 이어받아 두산상회를 설립했습니다. 포목 사업이 더 이상 유망하지 않다고 판단한 박 씨는 운송과 무역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1952년 정부가 동양맥주를 민간에 매각하자 입찰에 참여해 동양맥주를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박승직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사망했고,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박두병은 오비맥주를 키워 사업을 확장하고 맥아, 홉부터 병유리까지 맥주의 모든 제조 공정을 수직계열화했습니다. 그리고 맥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사업을 다각화했습니다. 합동통신사와 한양투자금융을 공동 설립하고 전자제품 회로 기판을 만드는 한국오크공업을 설립했습니다. 또 코카콜라와 직접 계약하여 생산과 유통도 시작했습니다. 그 외 버거킹, KFC, 네슬레, 코닥, 3M 등 해외 브랜드를 수입-유통하고 동화출판을 인수해 출판계에도 진출했습니다.
OB베어스 야구단 창단
1978년 두산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1981년 두산은 OB 베어스를 창단했습니다. 'OB'라는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맥주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OB 맥주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민담에 뿌리를 둔 튼튼하고 지혜로움의 상징인 '곰' 캐릭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80년에는 이미 OB 베어라는 생맥주 프랜차이즈가 존재했고, 야구단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창단 당시 서울에 연고지를 둔 MBC가 MBC의 청룡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OB 베어스는 대전에 연고지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두산은 서울이 아니면 구단을 운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3년 뒤에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기로 합의한 끝에 재단 설립이 확정되었습니다. 두산은 5명의 구단주가 서명한 문서에서 이 사건이 확인되었고, 이후 서울에 연고지를 둔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두산 기업의 위기
1991년, 두산은 낙동강 페놀 유출 사고로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회로 기판을 만들던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발생한 이 사고로 대구와 부산의 수돗물에서 악취가 나고 주민들은 구토와 설사를 호소했습니다. 두산전자는 수출 차질을 우려해 가동 재개를 요청했지만, 페놀 유출 사고가 추가로 발생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커졌습니다. 이때 경쟁사인 크라운맥주가 천연 암반수를 강조한 하이트를 출시하며 시장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결과 1995년 두산그룹의 적자 규모는 9000억 원에 달하며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후 두산그룹은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소비자와의 접촉이 적은 중공업 부문으로 진출했습니다. 2001년에는 오비맥주를 매각하고 오비베어스도 두산베어스로 사명을 변경하였고, 중공업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성했습니다. 2000년대에는 비핵심 사업을 매각하고 건설과 인프라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두산은 한국중공업, 한국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하며 사업 범위를 확대하고 해외 원천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적극 인수했습니다. 두산그룹은 2000년대 초반 구조조정 이후 순조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대규모 미분양과 손실로 어려움을 겪는 두산건설의 부동산 시장 침체로 또 다른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로 인해 두산건설은 2019년 상장폐지와 매각을 거치며 형제 간 경영권 분쟁과 비자금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그룹은 구조조정을 재개하며 주요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솔루스를 매각하고 그룹의 상징인 두산타워를 매각했습니다. 하지만 두산은 과거 위기를 극복하고 리노베이션을 진행했습니다. 최근 두산은 에너지, 로봇, 기계, 반도체 등 핫 필드에 집중하고 있고, 두산로보틱스는 로봇 기술 개발, 두산애너빌리티는 원자력 발전소 개발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중장비 업체인 두산바켓도 북미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며 그룹 실적을 이끌고 있습니다.
혹독한 구조조정 이후 두산이 부활하고 있으며,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이 두산의 장기 생존 비결이 된 것 같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창업 초기부터 사업 다각화를 위해 노력해 온 두산은 한국 역사에 많은 기록을 남기며 발전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두산그룹과 두산베어스의 야구를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