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아웃도어 매출 1위이자, 전 세계 아웃도어 매출의 독보적인 1위는 노스페이스입니다. 2023년 국내 매출은 1조 원을 넘겼습니다. 참고로 1조 원을 넘긴 패션 브랜드는 나이키, 아디다스, 유니클로 3개뿐입니다. 아웃도어 매출 2위인 디스커버리 3위인 k2를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돔형텐트
노스페이스 창업자 톰킨스
1943년 미국에서 태어난 더글라스 톰킨스는 파타고니아의 이본쉬나드처럼 암벽등반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등반을 하러 다녔습니다. 돈을 모아서 유럽의 알프스를 등반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미국으로 돌아와서 산림 감시원으로 일하면서 등반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여름 카약을 즐기다 산장으로 돌아가던 톰킨스는 수지 러셀과 운명처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수지 러셀은 노스페이스를 만든 진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러셀은 아웃도어 의류와 장비 사업을 하고 싶었던 찰나 톰킨스를 만났고, 1964년 장비사업을 시작하고 노스페이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노스페이스는 산의 북쪽 경사면을 말합니다. 유명한 큰 산중에는 북벽이 험난한 위험한 경우가 많은데 등반가들에게는 도전하고 싶은 코스입니다. 노스페이스 로고는 왼쪽은 평평하고 오른쪽은 둥그런 모양인데 요세미티 공원에 있는 하프돔이라는 절벽입니다. 뒷면으로는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는데 하프돔의 북벽은 수직이라 암벽등반으로 며칠 동안 올라가야 합니다. 노스페이스 로고는 창업을 하고 몇 년 뒤에 하프돔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톰킨스는 등반 장비를 만들려고 하던 중 파타고이나의 설립자 이본 쉬나드와 만나게 됩니다. 이본 쉬나드는 이때 장비회사 쉬나드 이큅먼트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노스페이스가 쉬나드 이큅먼트에서 장비를 납품받아서 판매를 했던 것입니다. 유난히 대화도 잘 통했던 두 사람은 같이 여행도 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스키 챔피언이었던 딕 드로우와 영국의 소설가 크리스 존스까지 4명이 낡은 미니밴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서 아르헨티나 끝에 있는 파타고니아까지 6개월간 여행을 떠났습니다. 넓고 황량한 파타고니아에서도 피트로이 산은 날씨가 변덕스러워 등정하기가 어려운 산입니다. 그들은 차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곳부터 장비를 차고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눈을 파서 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잠도 잤습니다. 그 당시는 장비나 의류가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그렇게 피츠로이의 정상에 도착한 네 사람의 모습을 다큐로 찍었고 마운틴 오브 스톰즈라는 영화로 개봉합니다. 아웃도어계의 두 거장 노스페이스와 파타고니아의 창업자가 동시에 등장하는 진귀한 영화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결정체 돔형 텐트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이본 쉬나드는 5년 뒤에 의류 사업을 시작할 때 파타고니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톰킨스도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얼어 죽을 뻔한 경험으로 침낭과 기능성 의류를 만들었습니다. 톰킨스가 그때 만든 패딩이 시에라파카입니다. 지금도 출시되고 있는 디자인인데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평범해 보이지만 당시로써는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추위와 비바람 바람을 동시에 막아줘서 등반가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침낭은 최초로 '내한온도' 즉, 침낭을 덮고 잘 때 견딜 수 있는 최저 온도를 표시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혁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스페이스의 진짜 혁신은 텐트에서 나왔습니다. 그전까지 일반적인 텐트는 A형 텐트였습니다. 어느 날, 톰킨스는 건축가이자 수학자인 리처드 풀러 박사가 '외부의 힘에 가장 강한 것은 구형이다. 달걀을 주먹으로 꽉 쥐어도 깨지지 않는 것은 힘이 분산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뉴스 기사를 접하게 됩니다. 톰킨스는 풀러 박사를 찾아가 돔형 텐트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1975년 인류 최초의 돔형 텐트 오벌 인텐션을 개발했습니다. 이 텐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효과를 입증합니다. 이듬해 파타고니아로 원정을 떠난 대원들이 있었는데, 텐트를 치고 자던 중 시속 20km의 폭풍설이 몰아쳤습니다. 다른 텐트는 다 날아가서 대원들이 변을 당했는데, 돔형 텐트를 쓴 대원들은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혁신을 이룬 노스페이스의 제품은 훨씬 더 유명해졌고 등산뿐만 아니라 스키까지 다양한 아웃도어 제품을 만들면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자연에 투자한 톰킨스 부부
사업으로 충분한 돈을 벌었지만 톰킨스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자연을 동경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제품을 만들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내 수지 러셀과 사업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결국 1989년 이혼을 합니다. 톰킨스는 이혼 후 에스프리, 노스페이스의 지분을 처분하면서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남미의 파타고니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남은 여생을 모두 파타고니아에 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재단을 만들고 활동을 하면서 인생의 두 번째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파타고니아의 창립 멤버였던 크리스틴 맥디빈입니다. 톰킨스는 그녀와 함께 남미의 파타고니아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파타고니아가 속한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다니면서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동안 사들인 땅만 200만 에이커로 서울의 13배가 넘는 면적입니다. 부부가 이 땅 사들인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국립공원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남미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개발이 되면서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톰킨스 부부는 빽빽한 숲과 풍부한 수자원, 비옥한 토질이 있는 원시림을 사들여 무분별하게 개발하지 못하게 하고 국가에 기증하여 국립공원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남미 사람들은 부부가 땅을 사들이는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날 톰킨스는 새 공원을 만들기 위해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카약을 타고 탐험하다가 강풍을 만납니다. 카약은 뒤집어졌고 톰킨스는 구조되었지만 저체온증으로 끝내 숨집니다. 2017년 72세의 나이였습니다. 톰킨스는 죽기 한 달 전 잡지 인터뷰에서 푸말린 파크를 가꾸고 있는데 도로, 안내소, 식당, 공원을 만든 뒤 칠레 정부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사고로 죽고 아내 맥디빈이 뜻을 이어받아 톰킨스가 소유했던 땅을 칠레 정부에 기부했습니다. 그 결과 칠레 전체 국립공원의 40% 크기의 새로운 국립공원이 생겼습니다.
노스페이스를 살린 도전정신
노스페이스는 다운패딩, 침낭, 텐트까지 R&D와 제품 혁신을 많이 했습니다. 수요가 있든 없든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대중적인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안만드는 제품은 많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는 항상 재고가 쌓였고, 재고를 아웃렛으로 보내 할인판매를 하다 보니 브랜드 이미지는 추락했고 항상 재무가 불안정했습니다. 그 결과 1988년 노스페이스는 오디세이홀딩스라는 회사에 인수됩니다. 그러다 1993년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노스페이스 회계 부정 사건으로 내실 있게 운영하기는커녕 매출과 이익을 두세 배 부풀려 리포트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회계 부정이 심각한 사건입니다. 주가는 바닥을 치고 노스페이스는 파산 신청 후 또다시 헐값에 매각됩니다. 잔스포츠, 이스트팩, 키플링을 가지고 있는 VF코퍼레이션이 노스페이스를 인수했습니다. 이렇게 험난한 상황에도 노스페이스의 제품 개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스페이스의 슬로건 'Never Stop Exploring'처럼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엄청나게 고급 기능을 갖춘 스키복이나 마운틴 재킷을 만들었습니다. 또 히말라야 같은 고산 원정을 위한 의류를 만들어 한계에 도전하는 전문 산악인들을 후원하며 그들에게 입혔습니다. 그런데 이 옷들을 도시 사람들이 사서 입기 시작했습니다. 노스페이는 운도 좋았습니다. 회계부정으로 회사가 파산 신청을 할 때는 힙합이 대세가 되면서 힙합퍼들이 노스페이스 패딩을 즐겨 입었습니다. 극한의 환경을 위한 옷을 만들어 왔지만 멈추지 않는 도전의 상징이 되면서 스트릿 패션에서도 아이콘으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산을 정말 좋아하는 분들은 정작 노스페이스를 잘 안 입지만 일상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스페이스를 찾습니다. 창업주는 일찍이 노스페이스를 떠났고 노스페이스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와중에 절대로 멈추지 않았던 모험정신, 아무도 안 만드는 것에 과거 과감히 투자했던 정신이 오늘날 거리에 노스페이스가 많아진 저력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