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독주를 마시면 너무 취해서 도수가 낮은 전통주나 약주를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약주를 되살린 기업 국순당의 이야기 준비했습니다.
국순당의 창업주 배상면
예전에는 술이 완전히 발효됐을 때 맨 위에 맑은 층을 떠낸 것을 청주 또는 약주라고 했습니다. 약주는 상류층이 즐기던 고급 양조주로 막걸리를 뜻하는 탁주와 대비되는 술입니다. 보통 10~15도로 매우 순하고, 또 맑게 잘 삭힌 술은 다음날 머리도 안 아프고 숙취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약주라고 불렸습니다. 이 약주를 되살린 기업이 바로 국순당입니다. 국순당의 배상면 창업주는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져서 술을 잘 못하시는 분입니다. 1924년생 배상면은 해방 후 대구농업전문학교 농예화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토양, 비료, 농약 같이 농업의 기술적 과제를 해결하는 학과였습니다. 그는 학부 때부터 미생물 반을 만들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다 주조연합회의 제안을 받아서 학교에 실험실을 만들고 술의 발효 재료인 종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양조장에서 실습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삼성 이병철 회장이 소유한 조선 양조장에서 인턴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연구실에서만 보던 종국을 직접 이 양조장에서 보니 신이 난 그는 매일 종국의 발효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주세법이 만든 청주와 약주
배상면은 1952년 기린 주조장을 인수하고 증류식 소주였던 기린 소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첫 사업은 오랫동안 고전합니다. 여러 실패 끝에 8년 만인 1960년에는 기린 양조장을 팔고 형님의 탁주 양조장에서 관리자로 일했습니다. 이때 양조장마다 공통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바로 술을 만드는 발효제인 '국'의 온도 관리가 어려웠습니다. '국'은 쌀을 찐 다음에 특정 곰팡이를 배양해서 만듭니다. 좋은 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밤에도 국을 들여다봐야 했고, 조금만 잘못하면 망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배상면은 밤낮으로 연구한 끝에 전통 누룩과 일본식 '입국'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발효제를 개발했습니다. 이걸 쓰면 품질이 균일한 탁주를 쉽게 대량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배상면은 이때부터 양조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서 양조장을 대상으로 발효제를 판매하면서 기술을 보급하고 교육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누룩을 판매한 것입니다. 1975년부터는 잡지 '태양통신'을 발간해서 양조기술을 전국을 알리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가 아쉽게 생각한 한 가지 있었습니다. 독일에는 맥주, 스코틀랜드는 위스키, 일본에는 사케가 있는데, 한국에는 대표하는 술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전통주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주세법이었습니다. 일제는 1916년 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세령을 내리면서 소규모 양조장을 정리하고 가정에서 술을 빚는 가양주 문화를 금지시켰습니다. 또 대형 양조장들도 술의 종류별로 면허를 엄격하게 적용해서 정해진 술만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이때 법에서 누룩이 1% 이상인 술은 청주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법 때문에 기존의 한국식 청주는 청주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반면, 일본식 청주인 사케는 전통 누룩이 아닌 일본식 입국을 쓰기 때문에 청주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법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그대로 적용한 탓에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 청주라고 부르던 술은 약주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이 불리한 조치가 업계의 이해관계 등이 얽혀서 많은 부분이 지금까지도 개정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습니다.
생쌀 발효법 복원
전통 술 장인들은 자취를 감추고 대기업에서는 약주에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고심하던 배상면 사장이 한국의 전통 주조법 중 하나인 생쌀 발효법을 복원하게 됩니다. 어느 날 배상면 사장이 책을 읽다가 예전 우리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빚은 백하주라는 술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하주가 여러 문헌에 언급이 돼 있었는데, 1554년에 쓰인 '고사촬요'에 따르면 만드는 법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쌀을 몇 번이나 씻어서 가루를 내고 거기에 끓는 물을 붓고, 누룩을 버무린 뒤에 항아리에 담는다고 합니다. 그동안 술을 빚을 때 쌀을 찌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한 배 사장은 생쌀을 발효시켜 술을 빚는다는 게 충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속는 셈 치고 이 레시피대로 해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현미경을 들여다보고는 실망했는데요. 술을 망치는 세균이 우글거리고, 효모 수도 너무 적고 냄새는 시큼하고 맛도 시고 떫었습니다. 몇 번이나 거듭을 해봤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버리려고 그냥 종이를 덮어두었다가 주말이 지나 출근해서 치우려고 보니 냄새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시큼했던 냄새는 없어지고 쌀은 삭아서 묽게 변해 있었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니 효모 수도 많아지고 드디어 발효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배 사장은 이 방식을 한참 연구해서 누룩의 효능을 결정하는 균이 거미줄곰팡이 리조푸스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이 균이 살아있어야 고소한 맛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배 사장은 딸의 결혼식 날 처음으로 이 생쌀 발효술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는데 반응이 대박이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전통주를 생쌀 발효술을 복원해 낸 것입니다. 배상면 사장은 1968년 리조프스균을 이용한 무증자 효소 제조 특허까지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만드는 공장이 없어서 진로 연구소에 제안을 해서 함께 실험을 했습니다. 생쌀로 술을 만든다는 말에 연구원들도 처음에는 안 믿었지만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주자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인 진로는 제품화를 거절했습니다. 당시에는 약주가 인기가 없었고, 발효와 유통 과정에서 사고 날까 봐 우려했습니다.
백세주의 탄생과 마케팅
배상면 사장은 대기업에서 받아주지 못하면 내가 독자적으로 생산하겠다고 결심하고 강릉에 있는 한 약주 공장을 매입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제품이 바로 1991년 선보인 백세주입니다. 100세까지 젊게 사는 술이라는 한자를 썼습니다. 백세주는 찹쌀과 누룩에 감초, 인삼, 오미자, 구기자 등 10가지 한약재를 넣은 그야말로 약주였습니다. 전통주에 대해서 좋은 술이라고 새롭게 포지셔닝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 회사 이름도 국순당으로 바꿨습니다. 이 이름은 고려 후기 임춘의 소설 국순전에서 따온 것입니다. 당시 주세법 때문에 약주와 탁주는 공장이 소재한 시 도에서만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3년 약주에 한해서 판매 구역 해제 조치가 내려지면서 전국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더 강력한 제약은 시장을 과점하고 있던 주류 업계였습니다. 대기업이 음식점과 술집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름도 없는 주조 회사가 술집에 영업을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회사에 합류한 첫째 아들 중호가 아이디어를 내니 바로 게릴라 마케팅입니다. 서울 외곽에 있는 유원지나 식당가를 돌면서 즉석 시음회를 열었습니다. 이때 장년층들은 약주가 머리 아프다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청년과 커플을 공략하는데요. 진짜 좋은 우리 술이 나왔는데 한번 맛보고 가세요. 이렇게 백세주를 맛본 젊은이들은 부드럽고 순한 맛에 반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시식대를 차려 놓으면 도매업자들이 훼방을 놓았습니다. 때문에 영업 직원들은 이동식 매대를 들고 다니면서 007 작전을 방불케 하면서 여기저기 옮겨 다녔습니다. 또 전국 식당의 벽면에 백세주 사진을 넣은 물통을 나눠주고, 또 식당이 분주할 때는 찾아가서 청소와 설거지도 도와주고 손님들의 신발 정리까지 했습니다. 직원들뿐만 아니라 배상면 회장 그리고 두 아들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판촉 활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 백세주는 점점 입소문이 났고 전국 음식점 15만 개에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백세주와 소주를 섞어서 오십세주라고 부르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소주가 도수가 높다 보니까 젊은이들에게 50세주가 딱 통했습니다. 그렇게 약주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출시 30년이 된 2022년까지 까지 7억 병을 판매하면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배상면 주가 vs 배혜정 도가
백세주가 잘 나가던 1996년 국순당은 큰아들 중호가 맡게 되고, 둘째 아들은 독립을 결심합니다. 둘째 영호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새 회사를 세우니 바로 '배상면 주가'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거짓 없이 술을 빚고 양심껏 사업을 하고 싶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최초로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만든 양조장 '배상면 주가'가 탄생했습니다. 배상면 주가는 산사나무 열매와 산수유로 빚은 산사춘을 선보였는데 출시 첫해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배상면 주가는 산사춘이 성공한 이후 민들레, 대포 등의 약주를 만들며 백세주를 잡겠다는 야심을 선보였습니다. 형제가 이렇게 약주 경쟁에 바쁜 동안 아버지의 마음은 딴 곳에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오랫동안 프리미엄 막걸리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지내던 딸을 불러 새로운 회사를 세우니 바로 딸의 이름을 내건 '배혜정 도가'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마흔 인 딸에게도 혹독한 수업을 시켰습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던 미생물 개발회사 '한국 발효'를 딸에게 물려주고 화성으로 미생물 공장을 옮겼습니다. 이때 배상면 회장의 나이가 80대 초반이었는데요. 매일 공장으로 출근해서 미생물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국 대부분의 양조장들이 이곳 누룩을 쓰고 있을 정도로 누룩에 최고 회사가 되었습니다. 또 배혜정 도가에서 2009년 우곡주를 만들어냅니다. 우곡은 배상면 회장의 호로 다시 태어나도 누룩 개발에 전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3년 배상면 회장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배상면 회장은 유언으로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에 올 것이니 준비하라고 자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배 회장의 유언은 적중했고 탁주시장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프리미엄 탁주를 일찍부터 준비했던 배혜정 도가는 '우곡생주'와 '호랑이 생막걸리'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후 국순당은 '국순당 생막걸리'와 '천억 프리바이오 막걸리'를, 배상면 주가는 '느린 마을 막걸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일생을 미생물밖에 몰랐던 배상면 회장님, 그의 자녀들이 이렇게 대한민국의 전통주를 이어 만들고 있습니다.